결정되었다? 기만이다!

2012. 12. 13. 08:00푸른복지/복지와 인문사회

공생의 시대 - 복지국가의 어깨를 딛고 복지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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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지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2. 문명이 변한다

3. 공생, 복지국가, 복지사회


4. 문명은 만들어 가는 것

- 복지사회를 향한 새로운 실험

- 결정되었다?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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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되었다? 기만이다!



운명론? 기만이다.


저는 새로운 문명이 도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새로운 문명이 다가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이 요구하는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운명론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미 갈 길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 문명에 적응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단지 적응과 부적응이라는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는 운명론은 사실이 아닙니다. 

기만에 가깝습니다. 

사회를 바꾸고자하는 사람에게 기존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하라는 것과 다름 없는 주장입니다. 


새로운 문명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문명의 전환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결정으로 문명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은 때가 바로 전환기 입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안정적으로 놓인 컵은 입으로 분다하여 밀리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매우 안정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변화를 주려면 안정적인만큼 에너지를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상의 모서리에 불안정하게 놓인 컵은 다릅니다. 

같은 무게, 같은 형태에도 불구하고 책상 모서리에 불안정하게 놓여있는 컵은 입으로 불어도 때로는 넘어질수도 있습니다. 

이는 변화의 경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이 안정적 시대에는 왠만한 에너지를 들여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명의 전환기는 경우가 다릅니다. 


문명의 전환기는 결국 문명과 새로운 문명의 경계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경계의 자리는 항상 불안정합니다. 

작은 충격에도 쉽게 변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방향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에너지를 결집하느냐에 따라 변화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지금은 문명의 전환기입니다. 

그러므로 문명의 방향은 결국 우리가 결합하여 에너지를 쌓는 방향으로 결정됩니다. 

전환기의 고통을 맞이하는 동시에 결정권도 가지는 것입니다. 

운명론은 기만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문명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영을 나누어 싸운다


문제는 진영을 나누어 싸우면서 우리의 눈이 가려진다는데 있습니다. 

앞에서도 계속 강조하였지만 경제성장과 복지는 서로 칼 같이 나눌 수 있을만큼 상호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경제 성장이 복지와 유관하며, 복지가 경제 성장과도 유관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상호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체제는 이미 한 번 거대하게 수정한 수정자본주의입니다. 

게다가 지금의 수정자본주의 또한 체제 자체가 붕괴될 만큼 위기 상황이므로 사회주의적 측면을 더 크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지가 강화된 체제는 자본주의일까요 사회주의일까요? 

자본주의 절반에 사회주의 절반이라면 이것은 자본주의 일까요 사회주의일까요? 

결국 무의한 논의일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단어를 붙잡고 이념으로 진영을 나누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 요구합니다. 

사실 국민은 정치권이 제시하는 정책을 보고 정밀하게 점검하며 방향을 결정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정책을 보고 자신의 문명을 개척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충 들어보고 이것은 자본주의네, 저것은 사회주의네 하며 정치권이 편가르는 것에 휩쓸려 버립니다. 

그렇게 이념과 진영에 이용 당합니다. 


정말로 저들 말대로 이념에 따라 서로 조합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정치권이 이념을 수정하고 융합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약점을 버려 발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타협한다는 이가 있다면 이익을 위해 야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치권은 말만 그러할 뿐 실상은 다릅니다. 

시장을 그렇게 강조하던 새누리당도 어느 덧 복지를 부르짖고 경제 민주화를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이념을 들먹입니다. 

민주당도 너무 좌로 갔나 우로 갔나 하며 왔다 갔다 눈치봅니다. 


결국 실상은 서로 융합하고 조합하면서도, 

우리에게는 임의로 편가르고 단순하게 구도를 만들어 이념을 선택하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정치권의 단어뿐인 이념 놀음, 편가르기에 국민이 놀아나서는 곤란합니다. 

사안이 발생하면 이념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념의 안경을 벗고 정책으로 


우리가 바로 서야 합니다. 

생각하기 싫어 단순하게 획일적으로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에 끌려다녀서는 안됩니다. 

정치권이 계속 저런 행태를 계속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를 허용하고 오히려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념의 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념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평생 이념의 노예로 이용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하물며 다중지능을 가지고 있고, 다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혈질적 기질도 있으며 동시에 우울증적 기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그러한데 하물며 복잡다양한 정책을 어떻게 획일적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정책은 상호 보완, 상호 수정 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이념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혼란스러워합니다. 

실제로 물어보면 다들 다양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싫어하고 꺼려합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히려 타당한 관점이라 봅니다. 

이미 세상은 딱 잘라 규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게 조합된 상황이므로 어떤 하나로 규정하기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념을 한 곳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며, 이것이 매우 솔직한 것이라 봅니다. 


현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게 조합된 상황인데, 아직도 관념 속에서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관념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정치권은 구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렇게 한다 해도 국민이 이런 편가르기에 휩싸여서는 곤란합니다. 


좌파 정책이다 우파 정책이다 결정할 것이 아니라 이 정책이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지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나는 우파다, 나는 좌파다 하는 식으로 결정하고 진영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정책을 수용해버리는 오류를 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아서는 진영의 탈을 쓴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나와도 진영의 탈을 쓰기만 하면 당선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새로운 사고방식은 내 삶과 유관할 때 폭발


우리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운명론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문명의 전환기에 선택권을 가진 특권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려면 우리는 어떤 에너지를 결집하여야 할까요? 

정권을 바꾸는 것 좋습니다. 제도를 바꾸는 것 좋습니다. 맞습니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변화는 무엇일까요? 

정권도, 제도도 어쩔 수 없이 반영할 수 밖에 없는 가장 무서운 근본적 변화는 무엇일까요?


바로 국민의 사고방식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무서운 변화입니다. 


앞에서 생산의 시대에서 절제와 공생의 시대로 바뀔 것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깨달음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당위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요구와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지 않습니다. 

단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맞다는 인식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기 쉽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100년전만 해도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위로는 맞는 이야기라 인정했지만, 

실제 행동을 이끌어내는 사고방식의 변화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연의 훼손과 내 삶이 무관하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다에 나가면 풍족한 물고기가 있었고, 땅을 파면 풍족한 화석연료가 나왔고, 숲에 가면 풍족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로 인해 내 삶에 미치는 영향도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 삶과는 무관한 일로 여겼습니다. 

결국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은 있을 수 있었으나 내 삶과 무관해 보였기 때문에 요구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인식에서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행동하는데 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업을 하는 곳에 가면 산란기에는 치어를 잡지 말아야 한다는 문구가 써있고, 어부 스스로 이를 지킵니다. 

내 삶과 유관해졌기 때문에 절제하는 것입니다. 


화석연료를 대신하여 재생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주장에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게다가 자연을 보호하는 활동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이제 내 삶과 유관해졌기 때문입니다. 


숲의 나무를 훼손하면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이제 내 삶과 유관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무서운 변화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되, 그것이 내 삶과 유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새로운 사고방식이 생기고, 이는 적극적인 요구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사고방식이 열리면, 

이는 정권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더 많은 것을 포괄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사고방식은 일상과 바닥에서 


정치권력은 새로운 사고방식 위에 떠있는 종이배와 같습니다. 

새로운 사고방식이 크게 자리를 잡으면 이는 정치권력으로도 결코 돌려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정치의 계절에는 정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 속에서 바닥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위해 얼마나 썩어지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위해 썩어지는 에너지가 쌓이고, 이것이 분출되는 때가 정치의 계절입니다. 

결국 일상과 바닥이 중요합니다. 


어차피 국민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 분야에 모두 자리잡고 있는 사람 또한 국민입니다. 

국민의 사고방식이 모여 바다를 만들고, 정치는 그 위에 떠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상과 바닥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널리 펼쳐야 합니다. 

절제가 필요하고 공생이 필요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점차 확산되는 것이 근본책이요, 이 결과가 드러나는 말단이 바로 정치의 계절입니다. 


하지만 만약 일상과 바닥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드는데 실패하거나, 기존과 다른 불합리한 사고가 펼쳐진다면 

이는 국민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로써 나타나는 정치의 결과 또한 불합리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역사적 전환기 이후 각 국가들이 선택한 대안도 달랐고, 그에 따라 국민들이 겪은 고통도 내용이 달랐습니다. 

새로운 문명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문명의 전환기에 일상과 바닥의 사고가 어떠한가에 따라 정치권의 선택도, 제도의 선택도, 국가의 선택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문명의 전화기에 절제와 공생의 가치가 일상과 바닥에서 자리잡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절제와 공생이 아닌 더 많은 소유와 생산, 경쟁의 가치가 일상과 바닥에 자리잡아버리면 매우 돌이키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고 그로써 우리에게 닥쳐올 고통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입니다. 

정치권이 그리했다 전가하면 비겁합니다. 

우리 세대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고, 나 또한 그들 중에 있는 것입니다. 



더 썩어지느냐의 문제


문명의 전환기입니다.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기입니다. 

이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사고방식이 자리 잡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새로운 사고방식은 일상과 바닥에서 결정됩니다. 

일상과 바닥의 활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상과 바닥의 사고는 어떻게 결정될까요? 

저는 어느 쪽에 더 썩어지는 사람이 많으냐에 따라 결정된다 봅니다. 

썩어지는 사람이 많은 쪽으로 사고방식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일상과 바닥에서 절제와 공생의 가치에 따라 썩어지는 사람이 많을 때 절제와 공생의 가치로 문명이 전환할 것이라 믿습니다. 

반면 일상과 바닥에서 소유와 생산, 경쟁의 가치에 헌신하고 썩어지는 사람이 많으면 문명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더 가속도를 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 몇 십 년 동안 대다수 국민이 부동산을 통해 부를 확보하는 것에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누군가는 재테크라 말하지만, 노동하지 않으며 어떻게 하면 시세 차익을 얻어 부를 누릴 수 있을까에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 지혜, 능력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렇게 일상과 바닥의 사고가 지금의 정치 권력과 경제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를 떠받치려는 권력과 정부를 만든 것이고, 

부동산 부채에 깔려 죽기 일보 직전인 경제 구조를 만든 것이고, 

자기 집은 꿈도 못 꾸는 2030 세대를 만든 것이고, 

그로써 자녀로부터 부양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세대를 만든 것입니다. 


자신이 기여한 바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정치권에만 전가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제 일상과 바닥에서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썩어지느냐에 따라 문명의 방향이 결정될 시기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권력이 없습니다. 

어차피 일상과 바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제와 공생의 가치에 썩어져야 합니다. 

그러할 때 절제와 공생의 가치가 반영되는 권력자가, 정치권이, 정치제도가, 국가제도가 비로소 선택 받을 것입니다. 


참된 승리를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특히 일상과 바닥에 있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참된 승리가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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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12년 상반기 출판을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만 출판하지 않고 인터넷에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