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5. 08:00ㆍ푸른복지/복지와 인문사회
공생의 시대 - 복지국가의 어깨를 딛고 복지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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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지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2. 문명이 변한다
-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신화
- 성장의 한계 1 – 빚에 허덕이는 경제
- 성장의 한계 2 – 지속가능하지 않은 경제
-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
- 새로운 깨달음 – 절제
3. 공생, 복지국가, 복지사회
4. 문명은 만들어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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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깨달음 – 절제
공생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경쟁
우리는 그동안 서로 경쟁하며 살아왔습니다.
세계와 경쟁해야 한다며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경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경쟁하며 더 많이 자원을 확보하려 경쟁하였고, 더 많은 생산품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였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경쟁하였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경쟁하였습니다.
이렇게 경쟁하며 경쟁력을 갖추었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성장은 했으나 경쟁이 심화되면서
더불어 살아오던 자연이 파괴되고 사람 관계가 파괴되고 공동체가 파괴되고 사회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자연 없이, 사람과의 관계 없이, 공동체 소속 없이, 사회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 경쟁의 원리를 최우선으로 두고 도입하였으나, 이 경쟁은 조건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큰 공생의 환경 속에서만 경쟁이 의미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즉 자연과의 공생, 사람과의 공생, 공동체와의 공생, 사회와의 공생이 유지되는 범위 안에서만 경쟁이 유효한 것입니다.
경쟁이 심화되어 공생을 아예 없애버리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이제서야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새롭게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는 경험적으로 직관적으로 이러한 통찰을 갖고 계셨습니다.
자연 못살게 굴지 마라, 사람 못살게 굴지 마라 그러면 너도 천벌 받는다며 수없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다만 배웠다는 지식인들이 이를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의 지식인 중 전체를 조망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란 기본적으로 한 분야만 집중하여 쪼개고 세밀하게 살펴보는 지식인에 가깝습니다.
흔히 지식인이 ‘분석’한다고 하는데, ‘분석’이라는 말 자체가 나누고 쪼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부분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지식인은 전체 시스템의 문제에는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경제입니다.
우리 사회는 경제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의 관점에서는 공생 속에서만 경쟁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의 기본 전제가 어떤 구조 내에서 투입하는 양과 이에 따른 결과 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숫자로 측정할 수 있는 돈으로 바꾸어서 말입니다.
따라서 투입된 자연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다루지 않으며, 결과로 나타난 생산품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직 돈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으로 분석하는 것이니,
돈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공생의 가치는 아예 다루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똑똑하다는 지식인이 하는 것은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는 효과가 있으나
이것이 전체 시스템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부정적 영향이 다른 연관성을 가진 것에 어떤 파급효과를 주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똑똑하다는 지식인이 온갖 수치와 그래프와 수식과 자료로 이것이 옳다며
우리 삶의 기반을 마음 놓고 파괴하도록 도운 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아는 섣부른 지식이 당장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인류의 삶을 위협으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는 것을 배웠다는 지식인이 알지 못한 것입니다.
반성하고 자신을 새롭게 다듬는 성찰이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내 범위 안에서는 논리가 무결하다 하더라도 전체로 확장했을 때는 오류로 점철될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과 사람과 공동체와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공생입니다.
공생의 범위 속에서만 인류가 살 수 있으므로 공생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삶을 설계하는 새로운 꺠달음을 인류가 얻어야 합니다.
이 전제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설계해야 할 것입니다.
공생하는 개인주의
공생 속에서만 경쟁이 의미가 있으며, 더불어 사는 가운데 개인의 삶도 존재한다는 성찰과 깨달음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오직 전문 영역에 갖힌 편협한 지식인, 자기 분야에 갖혀 세상을 해석하고 통제하고 바꿀 수 있다고 자만하는 지식인만
패러다임의 요구를 모를 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지식인 중 편협하고 자만하는 지식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생의 요구는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공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더욱 거세게 요구할 것입니다.
이로써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공생하는 개인주의’입니다.
개인주의로 경쟁하다 보니 공생이 파괴되었고 이로써 개인도 살 수 없다는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개인주의는 유지하면서도 서로 공생하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개인이 갑자기 착해져서 공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공생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 공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타성과 이기성이 조화를 이루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은 모두 자신의 네트워크 도구, 미디어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을 단위로 서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연결이 끝이 아닙니다.
연결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타인을 돕습니다.
작게는 트위터에서 리트윗을 통해 널리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리트윗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돕고, 그로써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프라인 관계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페이스북 안에서도 여전히 나타납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나도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는 공생의 관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경쟁하는 개인주의, 나만 아니면 된다는 개인주의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극심한 개인주의를 넘어 스스로를 위해 공생하는 개인주의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절제의 아름다움
공생하는 개인들이 점차 많아지면 이들은 공생의 범위를 넓혀갈 것입니다.
자연, 사람, 공동체, 사회와의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공생하려 노력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와 공생하려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며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타인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써 타인과 공생하기 위해 타인이 원하는 것을 적절히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스스로 절제하는 가운데 타인과 공생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인과 공생하는 법을 알아가면서 공동체, 사회 속에서 공생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그런데 이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과 공동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적절히 타협하면서 공생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즉 이 또한 기저에는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는 것으로 공생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제의 깨달음은 자연과의 공생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자연과 공생하려 노력합니다.
생활 속에서는 재활용을 위해 분리수거를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실천하며 주위에 동참하자며 실천합니다.
누군가는 열대우림을 지키기 위해 육식을 줄이는 삶을 직접 실천합니다.
육류 소비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소를 많이 키우게 되었습니다.
늘어난 소에게 신선한 풀을 먹이기 위해 인간은 열대우림을 파괴하여 목초지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목초지를 늘리기 위해 대규모 열대우림이 지금도 파되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지구 생태계 파괴는 결국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이러한 시스템의 연쇄 작용을 꺠달은 사람들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육류 선택을 줄여 즉 절제함으로써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이제 다음 세대와의 공생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세대의 것을 미리 당겨써버리는 것은 다음 세대를 핍박하여 지금 잔치를 여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먹을 것을 빼앗아 잔치를 벌이는 부모는 결코 존중받지 못할 것입니다.
파렴치한 세대, 자신의 욕심에 눈이 먼 세대, 미래 세대의 기반으로 호위호식을 누린 세대로 불리울 것입니다.
결국 다음 세대와도 공생하는 법을 배워갈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움직임이 지속가능한 경제, 지속가능한 성장, 지속가능한 개발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저의 가치는 바로 ‘절제’입니다.
절제를 통해 지금 세대만이 아닌 다음 세대, 미래 세대와의 공생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생입니다.
사람, 공동체, 사회, 자연과의 공생입니다.
하지만 지금 공생의 기반이 무너지려 합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공생의 기반을 다시 튼실히 다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공생의 문제를 풀어줄 열쇠는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절제’입니다.
외부와의 싸움에서 내부와의 싸움으로
인류는 욕구를 채우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를 발명해 냈고,
이로써 인류의 생산능력은 역사 속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로 높아진 생산능력을 보유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생산능력으로 인류는 욕구를 채웠습니다.
하지만 욕구는 또다시 커졌습니다.
욕구란 계속해서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커진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생산능력을 높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괴물 같이 커진 생산능력과 욕구가 인류를 잡아먹을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어쩌면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생산능력과 욕구일지도 모릅니다.
핵폭탄은 우리 눈에 보이는 위협이지만, 생산능력과 욕구는 다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오히려 인류와 인류가 살아갈 기반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가공할 도구일지 모릅니다.
인류는 이로써 완전히 새로운 도전 앞에 서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사였다면, 이제는 고삐 풀린 욕구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직면했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 차원의 문제로 바뀐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연과 싸워 자원을 획득하는데 집중했으며, 생산한 부를 누가 가질 것인가를 가지고 사람과 사회와 국가와 경쟁하였습니다.
나를 제외한 외부와의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욕구를 절제하는 종류의 싸움은 다릅니다.
외부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과의 싸움, 내 안에 욕구와의 싸움입니다.
물질의 싸움에서 정신의 싸움으로 본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인류는 새롭게 직면한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절제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을 얼마나 현실화할 수 있느냐입니다.
여러분은 고삐 풀린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잠재울 ‘절제’를 먼지 쌓인 내 마음 속에서 다시 꺼낼 준비가 되셨습니까?
필요없다며 내 마음 속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절제’를 다시 꺼낼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절제가 공생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생존의 위협에 놓인 인류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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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12년 상반기 출판을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만 출판하지 않고 인터넷에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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