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2. 19:48ㆍ푸른복지/복지와 인문사회
언어의 유사성에 휘둘려
정교하게 판단하는 것을 멀리해서는 곤란하다.
이러면 제대로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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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영과 공공
공영과 공공을 은연 중에 혼용하여 사용하는데,
공공성은 내용 등에 관한 것이고,
공영화는 운영 주체에 관한 것이라 직접 등치할 수 없다.
만약 공영이 곧 공공성이라는 결과로 반드시 이어진다면,
사회 모든 분야(시장까지 포함해서)를 그냥 공영으로 만들면
너무나도 쉽게 사회 공공성이 확보될텐데,
이 쉬운 것을 정부는 왜 안 하는가? 의지가 없어서일까?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과관계가 100%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0%도 아니다. 세상 단순하지 않다.)
공영도 공공성은 확보될 수도 훼손될 수도 있다.
물론 민영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실증하며 적합한 것을 찾아가야 하는데,
논의 시작단계부터 용어를 마구 섞어서 사용해버리면,
실증적 검토는 멀어지고 그냥 신념 싸움으로 넘어가 버린다..
이래서는 합리적 결론을 찾아갈 수 없다.
#
2. 사회사업, 사회복지, 사회서비스,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등
다 '사회'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다 사회를 좋게 만들자는 본질은 같지 않냐며 퉁치면서
다 같은 것으로 등치할 수 없다.
정말 그러하다면,
같은 것에 굳이 이름을 왜 따로 두는가.
이런 행위야말로 낭비의 극치 아니겠는가.
#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어쨌든 단어가 얼추 비슷하거나 일부만 중첩되면,
대충 같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직관적 게으름.
이는 지성은 안 쓰고 직관만 우선시하는
'귀찮음에 따른 반지성주의'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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